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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Arts and Code-Birds of Mahan> Eunpyeong History Hanok Museum, Seoul, Korea
http://www.heryun-kim.com 2022. 3. 24. 10:34https://tv.kakao.com/v/432327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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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련: 현대성의 시간축을 재설정하는 검은 선의 발현
임근준,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현대성(modernity)의 핵심은 무엇인가? 현대라는 시공은 어떻게 창출됐는가? 현대성을 추구하는 비전은 어떠한 기술매체와 예술매체를 통해 공유되고 성찰됐는가? 비평적 퍼스펙티브를 창출하고 전파하는 방식은 시대변환의 각 국면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 현대예술가들이 종종 망각하는 질문들이다.
만약, 현대예술을 통해 현대성의 체제를 (상징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무너뜨리고, 현대와 결별하는 새로운 시공을 창출할 수 있다면? 그러한 검증 불가능한 실험 혹은 모험을 감당할 예술가는 몇이나 될까? 현대예술은 지금과 같은 양태로 지속되는 것이 옳은가? 다중의 리얼리티가 납작한 타임라인 속에서 서로 상충하며 마구 흘러내리는 오늘의 기이한 상황 속에서, 현대예술은 현대적인 존재이기나 한가? 이미 주술적 존재, 스마트폰 사용자 각각에게 맞춰진 망상적 리얼리티의 실재성에 봉사하는 21세기의 의사-토템(pseudo-totem)이 되고 만 것 아닌가?
_ 예술가 김혜련의 경우
화가 김혜련(1964-)은 현대성의 시간축을 재설정하는 위대한 도전에 나선 예술가다. 현대 이전의 한반도에 펼쳐졌던 각 시대에 제작된 정념정형의 오브제들을 연결고리이자 관문으로 삼아, 고대의 미분된 묘선(描線)과 선각(線刻)이 이끄는 인간 정신의 남상축(濫觴軸)으로 전진한다. 고인돌에 새겨진 그림들을 조사해 그 조형과 그에 깃든 정념들을 함께 되새기고, 그로부터 재생되는 어떤 시각에 주파수를 맞춤으로써, 그는 기존의 한계점들을 뛰어넘었다. 산업 시대인의 관점에 봉사하는 전통을 답습하는 예술의 한계를, 모더니즘 타파에 눈이 멀어 의사-근대성의 전통을 직조하는 대안적 시도들의 한계를, 민족주의의 필터로 오분류되는 전통을 갈고 다듬는 부류의 의사-장인주의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2014년부터 진행해온 스터디 작업들을 통해, 김혜련은 자신만의 므네모시네 아틀라스를 작성해왔다. (대체로 한반도 남부 각 지역의 시대별 인공조형물들을 조사-탐구하고 묘선과 선각의 길을 추적-의태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한반도나 한국어 문화권에 국한하지 않는다.) 화가는 그가 주목하는 각 유물들의 그림들에서 선을 취해 모양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선긋기의 신체 행위를 야기하는 시각과, 시각과 그리기 행위 모두를 관제하는 동시에 그를 통해 재창출되는 정신’을, 반복적 그리기 행위를 통해 신체에 담는다. 그렇게 실천 행위 모델을 통해 수집-축적된 다종다양의 시각과 행위와 정신은, 다시 머릿속 상상계에서 하나의 면-선-점으로 환원된다. 면이 되는 점과 점이 되는 면을 부리는 그의 선들, 즉 확산적 탐구를 통해 환원되는 선들은, 새로운 해석적/창조적 힘을 발휘하는 단계에 이르는 중이다. 김혜련 특유의 ‘확산적 탐구를 통해 환원되는 선’은, 탐구 대상을 기존의 질서에서 해방시키는 동시에, 그 뼈대를 해체한다. 한데, 재구성의 과정에서 본디 탐구 대상에 담겨 있던 어떤 고대적 성격을 추출-강화시킨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2020년의 ≪예술과 암호-고조선≫ 연작에서, 화가는 “미지의 퇴적층을 파내며, 잊힌 조형성을 복원”하는 단계에 서 있었다. 한데, 2022년의 개인전 ≪그림을 쓰다: 훈민정음≫에서 그는 복원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 훈민정음의 이상향을 조형해온 기존의 조형 질서들을 해체하고 종합함으로써, 그에 담겨 있던 핵심을 재조형해놓고야 말았다. 훈민정음의 세계를 구성하는 판각본들과 여러 서예 기록물들을 세계를 타고 흐르는 고대적 가치관/조형관을 발견해, 새로운 암호적/주술적 긋기-그림의 원시적/초현대적 훈민정음 세계를 창출해낸 것이다.
김혜련의 선을 김호득의 선과 비교해 봐도 흥미롭다. 김호득의 붓에서 나오는 선이 ‘이미지로 독해되는 것을 용인하는 추상적 선묘 행위의 흥취를 특징으로 하는, 동시대적이고 도가적인 선’이라면, 김혜련의 선은 ‘대상의 원류를 보고 그 시간축에 잠들어있던 연결고리를 그어내는, 즉 대상을 죽여서 원현상을 되살리는 제사장의 칼과 같은 선’이기에, 비동시대적이고 종교적인 성격마저 띤다. 그래서 김혜련의 필선에는 그래서 기이한 골격(骨格)의 멋이 깃들기도 한다.
같은 말을 시적으로 함축해놓자면, 다음과 같다: “고대의 정신에 주파수를 맞추는 필선의 울림과, 심안에 의지하는 필획의 뼈대가,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우주 나무의 길을 찾고 또 찾는다.”
고대를 응시하는 오늘의 눈을 통해 아무도 요구한 적이 없는 내일을 그어내는 실천엔, 어떤 문화사적 예술사적 의의가 있을까? (김혜련의 선이 시간을 분절하는 동시에 재통합해내는 경향을 띤다는 점은, 언제 생각해도 흥미롭다.)
현대성의 체제로 창출할 수 있는 미래상과 그를 통해 구현해내는 ‘현재가 되는 근미래’엔 한계가 있으니, 이제 우리는 시간의 축을 재사고하고 재창조해야 하는 단계에 봉착해 있다. 참된 돌파 지점은 과학기술자들이 창출해낸다고도 하지만, 예술가나 예술가적 존재들의 기여도 무시할 것은 못된다.
_ (현대)미술과 창조적 원천으로서의 고대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도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도, 유물을 통해 고대를 탐구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회화 세계—그림을 보는 방식과 세상을 보고 읽는 방식 모두의 혁신을 요구했던—를 창조해냈다. 일안원근법적 재현의 한계를 벗어나는 현상학적/경험주의적 현대미술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폴 세잔은 루벤스와 푸생을 참조해 창조적 고대의 재발견에 동참했고, 위대한 대수욕도의 미완-세계에 가 닿을 수 있었다. 세잔에게 자극을 받은 마티스가 ≪삶의 기쁨(Le bonheur de vivre)≫에서 선사시대 벽화를 참조하고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을 통해 그를 다시 반박하고 나선 역사는 더 잘 알려져 있다. 즉, 현대미술의 거장들도 늘 새로운 현대성의 한계 지점에서 고대를 찾고 또 그로부터 아무도 요청한 적이 없는 미래를 추출하고 또 구현해냈다.
민족주의적 전통 탐구의 프로젝트에 자리를 내어주거나 혹은 그 흐름에 병합되고 말았지만, 통일신라의 유적이나 고구려 고분의 벽화 등이 한때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고대적 영감의 원천으로 간주됐던 적이 있다. 폐허 동인이 상상의 원천으로 삼았던 것도, 조각가 김복진이 조선미의 현대적 재해석-창출의 기준점으로 삼았던 것도, 통일신라시대의 유적과 유물이었다.
(이중섭이 학창 시절 고구려 고분에 들어가 벽화를 바라보다 잠에 빠지곤 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사실 고구려가 고대적 영감의 원천으로 지목된 경우는 흔치 않다. 북조선이 고구려 역사를 적극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1992년의 한중 수교 이후 중국에 항의하기 위한 차원이었고, 1993년 2월 출범한 김영삼의 문민정부도 뒤질세라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강조하게 됐더랬다. 대표적인 기획이, 1993년 11월 18일-12월 26일의 ≪아! 고구려전≫이었다. 본디 중국 집안의 고구려 고분 벽화 사진전이었지만, 미술인과 대중 모두 고구려에 대한 환상을 바탕으로 민족주의적 자긍심을 투사했고, 블록버스터 전시와 사회 현상이 됐다. 이러한 역사 회복의 열망은, 이후 “클럽 고구려”[1996년 5월]) 등장 같은 웃지 못 할 사회 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그러한 사회 현상이 유의미한 성취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쉽게 고쳐 말해, 김복진의 경우는, 통일신라시기의 불상을 기준점 삼아, 르네상스적 도약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조각가였다. 따라서, 1935년의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 본존불 공모―불모 일섭 스님 등 총 5인이 경쟁을 벌였던―에서 그가 당선자의 영예를 거머쥐었던 일은, 그리고 38척(11.82m)의 불상이 상당히 현대적 성격을 띠었던 점은, 신라의 폐허로부터 새로운 민족적 중흥의 미래를 보고자했던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통일신라와 일부 유물에서 발견되는 균제미를 민족적 자존심의 기준점으로 사고하는 경향은, 한국 전쟁 이후 남북한 미술 양쪽에 공히 영향을 미쳤다. 월북 미술인 이여성(1901-?)의 경우엔 통일신라의 균제미가 고려와 조선에서 퇴보하는 이유를 봉건 시대의 한계로 지목했다가, 식민 사관에 부합하는 주장이라고 비난을 받고 숙청을 당하고 말았다지만, 그러한 유물론적 역사관을 미술사에 적용한 것은, 윤희순(1902-1947)이나 안석주(1901-1950) 등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선 통일신라와 일부 유물에서 발견되는 균제미를 칭송하는 경향이, 이승만 정권의 몰락 이후, 대통령 박정희와 이병철을 통해 한층 더 강화되기도 했지만, 그러한 편향은 1970년대에 보다 폭넓은 전통에 주목하는 흐름이 대두하며 빠르게 극복됐다.
_ 한국의 전통 탐구나 고대 탐구 경향에 내재됐던 한계
하면, 한국의 현대미술사에서 전통 탐구나 고대 탐구는 어떤 양상을 띠었는가?
근대화에 앞장선 개화 중인 집안의 자제 고희동(1886-1965)이 일본 유학을 통해 양화기법을 습득한 이후, 위로는 역시 개화 중인 집안의 자제로서 독립운동에 기여한 서화수집-감식가 오세창(1864-1953), 아래로는 대부호의 아들이자 문화재 수집가인 전형필(1906-1962) 등과 교유하며 서화골동의 세계에 집착하는 가운데, 전통적 서화의 영역으로 복귀해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근대화된/현대화된 동양화를 시도했던 일이나, 김규진(1868-1933)이 사진술을 익히고 실행함으로써 사진적 리얼리티 이후의 전통 서화를 고민하고자 애쓰며 여러 후진을 양성했던 일, 그리고 소위 향토색 탐구가 유행하고 곧 이어 문명적 폐허로부터 새로이 출발하는 민족(주의)적 서사를 우회적으로 구현하려는 경향이 광범위하게 형성됐던 일, 과거의 어떤 신화적/가상적 시공을 때 묻지 않은 아르카디아(이상향)로 표현하려는 강박이 등장했던 일, 해방의 서사에 알리바이를 부여하기 위해 노동자와 농민 등 근로인민대중을 고통 받는 타자인 동시에 토착적 힘을 배태한 혁명 주도 계급으로 묘사하고자 애썼던 일, 대다수의 화가가 근대적/현대적 미술가로서의 제 정체성을 묻는 자화상을 적어도 한 점씩은 그리지 않을 수 없었던 일, 모두 외래적 시각성의 토착화라는 미완의 과제(종종 토착성에서 외래적 시각성에 준하는 무엇을 찾아 실현해내는 프로젝트로 전화됐던)를 하루빨리 완수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에 시달린 결과에 다름 아니었다.
서구의 리얼리즘 전통을 학습하고 체화해 그것에 상응하는 시각성 체제를 조선 혹은 동아에 구현하겠다는 욕망은 강렬했지만, 그것을 토착화해놓으면, 아이러니하게도, 다음 세대에겐 더욱 이어받기 어려운 모순적 존재, 결함이 또렷이 드러나는 존재, 비판을 통해 극복의 대상으로 지목당하고 그 성취를 부정당하기 십상인 존재가 됐다. 그러한 세대적 부정과 재부정의 양상은, 뒤늦게 서구의 원근법적 세계관과 유화 기법 등을 받아들인 일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컨대, 서구의 리얼리즘에 화답해 신일본화를 주창한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1863-1913)과 그를 추종해 특유의 몽롱체 화풍을 발전시킨 화가들은, ‘일본적인 것은 평면적인 것이다’라는 문제의식을 앞세운 후대에 의해 역사적 성취를 간단히 부정당했다.
한국전쟁 이후 북조선에서 전개된 조선화 논쟁과 그를 통한 숙청의 과정은, 그러한 부정의 변증법이 어떠한 극단에 치달을 수 있는지 잘 보여줬다. 1953년 휴전 이후, 한때 소비에트 스타일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교육이 실시되는가 싶었지만, 김용준(1904-1967)과 정종여(1914-1984) 등의 전통주의자 미술인들에 의해 친러시아파와 친중국파, 그리고 남로당계 미술인들이 차례로 숙청됐고, 섣부르게 서구적 리얼리즘에 의거해 변증법적 한국미술사를 주창했던 이여성과 그의 가르침을 따랐던 이쾌대(1913-1965)의 경우, 주요 직책에서 제거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비극적 최후를 맞아야 했다. (식민사관에 부분적으로 부합하는 ‘조선 미술의 퇴화’를 이야기한 것은, 정녕 죽을 죄였나?) 반면, 평양미술대학의 강좌장으로서, 서화의 전통과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적절히 융합해보고자 했던 김용준은, 1960년대 중반 주체사상의 형성 과정을 잘 읽지 못했던듯하고, 일설에 의하면, 1967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동지인 정종여에게 밀려날 때, 김용준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일짜감치 카프의 교조주의를 비판했던 김용준은, 1930년 뜻을 함께 하는 작가들을 모아 백만양화회를 조직함으로써 자신의 전위미술론을 실체화했더랬다. 당시 김용준은 서구의 현대예술이 동양정신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봤는데, 이러한 사관은 심영섭 등의 아세아주의론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조선의 전통미술을 연구해 새로운 민족적 지향점을 창출해야 한다는 창조적 민족주의자로서의 비전이었다. 하면, 어쩌다가 그의 전통주의에 입각한 전위미술론 혹은 전통주의에 입각한 형식주의적 모더니즘론은, 북조선의 주체미술의 탄생에 기여하고 숙청을 통해 기각되고 말살 당하게 됐을까? 1930년대 중후반 김용준의 비전에 영향을 받아 시도됐던 일련의 조선적 유화들은, 주체미술과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 것일까? 그들이 꿈꿨던 새로운 현실은 각각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서구의 리얼리즘에 상응하는 것이 구현되면, 그를 통해 형성-강화된 민족주의적 잣대를 따르는 후속 세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비판하고 부정하게 되는 경향이 강했다. 흥미롭게도 그러한 패턴은, 모더니즘의 전개 과정에서도 유사한 양태로 반복됐다. 서구(혹은 근대화한/현대화한 일본)의 모더니즘에 상응하는 것이 구현되면, 그것은 서구(혹은 근대화한/현대화한 일본)의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한 결과로 비판받았고, 결국 매 주요 변곡점에서 모더니즘은 전통(종종 지역주의나 지역색)과 결합하는 양상을 띠었다. 예컨대, 한국식 앵포르멜 운동은 1960년의 4.19혁명과 맞물리며 고색추상의 경향을 띠었고, 재차 그것은 1972년의 유신 이후 내면에 침잠하는 의사-선비적 수신론(修身論)과 결합하며 보수화의 길을 걷더니, 1975년에 이르면 식민기 조선미론의 전후 업데이트 버전으로 독해되는 백색/단색조 담론으로 확장하는 양태를 드러내게 된다.
반면, 1979년 조직된 ‘현실과 발언’과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 그리고 1982년 결성된 ‘두렁’과 ‘임술년’ 등에 의해 전개된 민족민중미술운동은, 전후의 추상미술에 대비되는 사회적 리얼리즘의 양태로 출발해, 반외세적 시각을 담은 민족/민중-역사화(해방 40주년이었던 1985년, 시민사회와 대학사회로부터 상당한 반향을 얻었던)와 민중-전통에 의거한 해방의 비전을 제시하는 대형 걸개그림의 제작 등으로 다각화했다. 한데, 1987/88년에 정점에 달했던 민족민중미술운동은, 이념적으로는 분명한 몇몇 계열을 통해 전개됐을지 몰라도, 양식적으로는 다양한(때로 내용에 모순이 되는) 시도를 포괄하는 불분명한 것이기도 했다. 국내의 투쟁적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큰 세계미술사의 차원에서 보자면, 비평적 이미지의 동시다발적 귀환은, 탈식민 국가의 모더니즘에 대항하는 전투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그리 되지는 않았지만.
과연, ‘리얼한 것’(실재성: the real)을 추구하려는 충동과, ‘모던한 것’(the modern), 혹은 모더니티(modernity)를 추구하려는 충동은, 서로를 지탱하는 버팀목 노릇을 했다. 그 두 가지가 같은 시공을 분할하며 상충하고 또 뒤엉키는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동시대성은, 그 두 가지가 뒤엉킨 뿌리에서 피어난 꽃이었지만, 여전히 한국현대미술사 연구의 대개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진영의 상호 부정적 반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통합적 시각으로 한국/현대/미술의 역사, 즉 한국이라는 국가주의가 강제하는 민족주의 사관에서 탈피하는 시각으로 지역의 미술사를 연구하고 논하려면, 장차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 답은 하나다. 오늘을 규정하는 전통관과 미래관 양자를 갱신하는 것.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축을 재설정하는 일이 필수다.
_ 아시아 공통의 고대를 재발견하고 재탐구하는 미완의 과제
그렇다면, 아시아 공통의 고대를 재발견하고 재탐구해 더 새로운 미래를 상상해내고야 마는 미술가는 왜 나오지 못했을까?
주지하다시피, 고유섭 등의 조선미론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야나기 무네요시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동아시아의 민예품을 고루 수집하고 연구해,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동아시아의 미래를 창출하는 현대적 미술공예운동을 벌이기를 꿈꿨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의 아름다움에 빠져 조선민예품을 수집했다는 식의 주장은, 사실 왜곡이다. 일본민예관에 소장된 조선 민예품 등의 수준이 높지 않다며 그의 안목을 폄하하는 연구자도 있는데, 역시 오해다. 애초에 그는 소위 명품을 수집할 생각이 없었다. 보통 사람들이 사용했던 보통의 물건들에서 보통 이상의 미감을 찾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1924년 수집품을 한데 모아 조선민예관을 설립한 뒤, 쇼와 시대(1926-1989)에 접어들자 일본민예관을 설립하는 일에 몰두해 1936년 개관에 성공하는 과정은, 시대정신의 숨 가쁜 변화에 조응한 결과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평가할 때면, “조선을 ‘연약하고 수동적인 식민지’라는 타자로 바라봄으로써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에 일조한 동양주의자”라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박계리 등이 박서보의 단색화에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동양주의를 읽어낼 수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전후의 한국인 미술가들은 자신들의 작업에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을 읽어내는 일을 단호하게 거부해왔다. 하면, 그의 성취는 한국인이 공개적으로 이어받을 수 없는 유산일까? 야나기 무네요시가 추진한 민예운동은 당대에 잘 성취되지 않았지만, 실패로 멈추지 않았다.
일본민예관장으로 봉직하다 2011년 12월 서거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아들 야나기 소리(柳宗理, 1915–2011)는 부친의 유업을 이어 일본의 1세대 산업디자이너로서 큰 업적을 세웠고, 그의 사후 민예관의 관장으로 선임된 인물은, 놀랍게도 현재 일본의 현대디자인계를 대표하는 나오토 후카사와(深澤直人, 1956-)였다. 나오토 후카사와의 디자인 방법론 ‘수퍼 노멀’은, 일상적 사물과 제품에서 20세기 굿디자인에 버금가는 미덕을 찾아 따르자는 실천 사상으로, 야나기 무네요시의 정신을 그대로 빼닮았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정신을 계승한 디자이너는 나오토 후카사와 한 명이 아니다. 나오토 후카사와에게 거의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존재로서, 동년배 디자이너 하라 켄야(原硏哉, Kenya Hara, 1958~)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2002년부터 ‘무인양품(MUJI)’의 아트디렉터로 활동해온 하라 켄야는 제 저술 ≪디자인의 디자인≫(2007), ≪백(白)≫(2008) 등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예찬(陰翳礼讃)≫(1933년)을 주된 레퍼런스처럼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우환이나 나카하라 유스케의 의사-동양주의를 통한 타자의 의태라는 전략을 꽤 열심히 참조한 티가 난다.
모노하와 단색화가 미니멀리즘을 동양화하기 위해 의사-동양주의의 논법을 내세워 현존/초월의 양의적(兩義的) 인식-장을 제시-창출해냈듯, 하라 켄야는 비어있음의 ‘백’을 제시해 모노크롬의 디자인을 구현했다. 한데, 무인양품의 세계가 창출하는 것은 새로이 갱신된 현대적인 현실이 아닌가. 무인양품의 소비자들에게 구현되는 모종의 ‘리얼한 것’에서 조선민예의 흔적을 느낀다면, 과장이 될까? 왜 한국의 디자이너들 가운데,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 등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구현하는 디자인을 추구하고, 또 그에 성공한 경우를 찾기는 어려울까?
≪뿌리 깊은 나무≫를 창간한 한창기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을 전후 한국사회에 걸맞게 갱신해낸 인물이었다. 그의 창조적 저널리즘을 통해서, 새로운 글쓰기, 새로운 에디터십, 새로운 사진미학, 새로운 편집디자인, 새로운 인테리어, 새로운 미술비평, 새로운 옹기 문화, 새로운 여성상, 새로운 한국의 인문지리학 등이 추구됐다. 현대적 미감의 차원에서, 동시대에 그에 필적할만한 견인차 노릇을 한 사람은, 건축가 김수근 한 명이었다. 하면, 한창기가 창출하기를 꿈꿨던 토속적 현대성은, 혹은 김수근이 추구했던 선비적/유교적 현대성은, 오늘날 한국인의 삶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계승되고 있을까? 그들의 성과를 계승하는 동시에 극복하고자 한다면, 어떤 노력을 기울어야 좋을까?
_ 하나의 길이 되는 김혜련; 고대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우리를 해방으로 인도하는
나는 화가 김혜련을 ‘한국성 탐구를 통해 한국성의 한계를 초극하는 단계에 도달한, 의문의 여지가 없는 거장’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예술가로서 그는, 하나의 확산 가능한, 수행적 실천의 모델이 된다. 그는 고대를 가설적 기준점으로 삼아, 각 지역의 각 시대별 유물을 관문으로 삼는다. 오늘과 고대를 연결하는 관문으로 지목된 유물들을 통해, 우리는 고대와 마주하고, 그 조우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보도록 강제된다.
반면, 조각가 권진규는 1950년대 중반에 통일신라의 유물과 폐허를 상상력의 원점으로 삼는 구식 편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더랬다. ≪보살입상≫(1955)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형식을 취하는 듯하면서도, 미감으로는 그에서 벗어나 모쿠지키불(木喰佛)과 같은 민예적 색채를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국보 하니와를 참조해, 테라코타 조각이 또 다른 고대로의 연결고리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그는 그리스 고대미술의 아르카익한 성격을 한일 복합의 언어를 통해 현대화하고자 했고, 아르카익한 고색지향(古色志向)의 균제미를 구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전엔 민족주의 세계관이 강화되는 국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 그가 선택한 최후의 승부수는 죽음. 그는 “부모가 아이를 위해서 죽을 수 있듯이 나는 나의 작품을 위해서 죽겠다”라는 발언을 남겼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국경을 넘나드는 다중 전통의 혼융을 통해 새로운 미래지향성을 추구하려는 시도들은,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늘 실패해왔다. 소위 ‘아시아주의자’였던 백남순(1904-1994)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낙원≫(1937)이 지금에야 상찬을 받지만, 작가의 생전엔 설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지금도 북조선 미술계는 임용련 백남순 부부를 맹비난하고 있다.)
한데, 김혜련은 포스트-민족주의자이자 포스트-아시아주의자로서의 새로운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한반도의 전통을 통해 고대로 가는 길을 찾고, 고대의 상호연결성을 바탕으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한계를 초월한다. 그가 탐험하는 고대의 상호연결성은, 내일의 인터-아시아(inter-Asia)를 위한 공통의 문화 자산이 될 운명이다. 따라서, 머잖아 그는, 아랫세대의 화가들에게 대안적/필연적 시공이자 영감의 원천으로서 발굴/발견되고야 말리라 확신한다. ///
추신) 김혜련이 우리를 고대의 상호연결성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논점이 두드러진다. 바로 조선미론 한국미론의 중핵은 ? 이루는 가치의 재해석 가능성이다.
조선인 가운데 최초로 현대적 미술사 연구방법론에 따라 연구를 전개했던 고유섭은, 1940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조선미술문화의 몇낱 성격”과 1941년 ≪춘추≫에 기고한 “조선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 문제”에서, 조선미술의 특성을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 등으로 설명했다.
큰 질문을 던져보자. 19세기 후반 이래의 한국(근)현대미술의 역사에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 등의 가치를 가장 잘 구현해낸 현대미술가는 누구일까?
고유섭의 이러한 조선미론은, 김용준에게 영향을 미쳤다. 김용준은 연배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김환기와 교유하며 그를 ‘수화소노인’이라고 불렀다. 김환기를 ? 김용준의 영향에 따라, 백자를 수집하고 달항아리라고 불렀으며, 진화하는 제 작업 세계를 지탱하는 미감의 우물로 삼았다. 그 결과,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 등의 가치를 조선적인 유화로 구현해내는데 성공한 첫 현대화가는, 김환기가 됐다. 김환기에 필적하는 존재는 이응노 딱 한 명뿐인데, 이응노는 ‘무계획의 계획’이라는 잣대 앞에서 다소 취약함을 드러냈다. (오히려 이응노의 조각에서는 ‘무계획의 계획’이 멋지게 구현되곤 했다.)
하면, 전후 세대의 리얼리즘 화가 가운데에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 등의 가치를 가장 잘 구현해낸 현대미술가는 누구일까?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이라는 항목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지만, 일단 떠오르는 미술가는 오윤이다. 하지만,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 등의 가치를 고루 구현하고 있는 미술가는 서용선이다. 그가 ‘신표현주의적 한국화’를 통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왔다는 점에 주목하면, 다시 표현주의를 대안으로 생각했던 김용준이 떠오른다. 리얼리즘의 차원에서 볼 때, 서용선은 민중미술보다 한 발짝 더 멀리 나아간 면이 있다. 민중미술가들을 추동했던 ‘리얼한 것’의 원형은, 서용선을 추동해온 ‘리얼한 것’의 원형과 어디까지 같고 또 다른 것이었을까?
문제는, 앞서 언급한 미술가들이 모두,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의 가치를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범주 내에서 구현하거나, 아니라고 해도, 그 자체를 재정의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데 있다. 따라서, 고대로 연결되는 무수한 구멍들을 통해, 인류 공통의 상호 연결성의 시공을 창출하는 김혜련이,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의 가치를 구현해내는 장면은, 거의 자동적으로 흥미로운 논쟁거리를 제시한다.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의 가치는, 근역(무궁화의 땅) 혹은 조선/한국만의 것이 아니라, 고대 인류 공통의 자산이자 특질인 것은 아닌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은 고대적 정신과 행위의 기본 패턴인 것은 아닌가?
추신2) 어려서부터 오랜 역사가 깃든 곳이나 사물을 마주하게 되면, 늘 고대의 위대한 정령들에게 기도하곤 했다. 내가 그대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겠노라고. 하니 보잘것없는 내게 힘과 운을 보태 달라고.
김혜련 화백의 파주 작업실에서 나는 자라나는 우주목을 봤다. 돌아오는 길에, 시각뇌-마음에 담긴 그 우주목을 향해/통해 기원의 노래를 불렀다. 한반도 문화를 관통해온 ‘구수한 큰 맛’(현대화를 거부해온 원시적 품위)으로 온 인류를 아우르는 우주목의 대안적 질서를 재발견하고 그 거듭남의 시공을 함께/따로 나누는 사업에, 생명 창조에 가까운 힘을 허락해 달라고.
추신) 개인전 ≪예술과 암호, 마한의 새≫(2022년 3월 15일-6월 12일,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삼각산금암미술관)에서 작가는, 마한백제문화권에서 발굴되는 새발무늬토기와 관련 유적을 추적-고찰하고, 그로부터 추출한 추상 행위를 다시 한글 탐구와 연결 짓는다. 그러한 연결성의 논리는, 다뉴세문경을 추적-고찰한 연작이나, 전라남도 나주시 운곡동, 전라북도 임실군 가덕리 등지의 고대 암각화를 바탕으로 한 작업들과 다시 성좌를 이룬다. 이러한 삼각 성좌의 성운 속에서, 다중 함의를 품은 기호가 된 새발자국들은, 관람객의 정신세계를 모종의 춤으로 이끈다.
화살표 같은 기호의 안내에 따라 시각뇌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보면, 홀린 나/우리를 통해, 새가 된 고대인들이 오늘에 내려앉는다. 우리에게 날개가 달리는 순간이다.
Q. 독일에서의 창작과 초기 유화 작업에 대해
저는 원래 독문학을 전공하였으나 언어나 문자보다는 이미지가 더 즉각적이고 중요하다는 나름의 확신을 갖게 되어 미대수업을 많이 들었고, 이어 대학원에서 서양화 이론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선이나 색채, 형태에 대한 특별한 감수성이 제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특히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 사조의 강렬한 색채대비가 제 안의 그 무엇인가 원초적인, 실존적인 갈증을 자극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국에서 미술이론 석사학위를 받은 다음 실제로 화가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독일로 가서 국립베를린종합예술대학 회화과에서 회화실기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학사에 해당하는 압졸벤트 졸업전시의 유화 작품에 대한 평가가 매우 좋아서 지도교수님의 추천으로 베를린 시내의 한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게 되었고, 독일 일간지 베를린 모르겐포스트와 타게스슈피겔의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화들은 반 고흐 또는 앙리 마티스를 연상시키는 정물화가 대부분이었으나 때때로 인물화, 풍경화 등을 그렸고 새로운 소재를 만나면 먹 드로잉으로 먼저 대상에 대해 조형적 사색을 하곤 하였습니다.
유화물감은 다루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붓이 더러워질 때, 색채를 혼합하여 만들 때, 물감이 더디게 마르기 때문에 표면이 굳기 전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물리적 법칙 안에서 자기만의 개성적인 색채를 만들어 내기 어려운 재료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유화물감의 결과물보다는 그 과정에 더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실패해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붓질의 결과보다는 붓질의 과정이 더 즐겁다면 실패가 무슨 문제가 될까요? 처음부터 저는 유화의 물성, 즉 붓질의 특성이나 물감 색채의 병치효과, 공간의 생성 등을 발견하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밀림 속에 들어선 것 같은, 탐험의 과정이 그림그리기의 매력이었습니다. 계획된 완성본 같은 것은 없었고 오직 발견의 기쁨, 지각의 즐거움이 앞섰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유화 작품을 해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도1)
유화는 심한 경우 두껍게 그렸을 때 완전히 건조하려면 몇 달이 걸리기도 하는데, 아크릴은 한두 시간이면 다 말라버립니다. 정말 편리하지요. 그런데 이 부분이 오히려 저랑 안 맞아서 채색작품을 할 때는 유화를 주로 했었습니다. 유화의 더디게 마르는 과정이 저에게는 더 유기체 같았고 천천히 조형적 탐색을 할 시간적 여유를 주었습니다.
Q. 먹 드로잉 작업의 동기에 대해
베를린 유학 시절부터 유화와 먹은 저의 두 가지 주재료였습니다. 아크릴 물감은 저에게 안 맞아서 채색작품은 항상 유화로 그렸습니다. 불편해서 사람들이 점점 쓰지 않는 재료인 정통 서양화 재료 유화와 곰팡이 등 보관이 어려워 마찬가지로 점점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먹이 저의 오랜 작품 재료였으며 지금도 이 두 가지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유화에서 먹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유화처럼 먹을, 먹처럼 유화를 다루고 싶은 것이 저의 작가적 입장입니다.
Q. 유화의 검은색과 먹색의 차이
일반적으로 검은색 유화는 탁하고 답답해 넓은 면적을 칠했을 때 숨이 막히는 절망감을 줍니다. 표면에 기름막까지 생겨 우리가 검정에 투영시키는 부정적인 감정에 딱 맞는 인상을 주지요. 생명력이 없어 보인다는 뜻입니다. 색채가 주는 활력이 배제된 색채 아닌 색상, 색채라고 하기보다는 색채가 없는 상태인 면적, 무채색이라고 하지요. 서양미술사에서 그 검은색이 주된 양식적 요소로 등장한 때가 있습니다. 17세기 바로크 시대 카라밧지오Michelangelo da Caravaggio의 검은 배경 유화 작품들을 <암흑양식>이라고 부릅니다. 베를린 종합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옆에 있는 베를린공과대학 인문학부에서 예술학과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을 1997년 즈음, 박사논문 지도교수님과 10박 11일의 로마 현장학습을 할 때였습니다. 암흑양식의 카라밧지오 유화 작품 앞에서 숨이 막히는 강렬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있는 온갖 화려한 색상들 못지않은 생생함, 유기체적인 생명력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이며 실존적인, 마치 죽음을 직시하되 죽음을 뛰어넘으려는 강렬한 자아의식을, 카라밧지오의 검은색 유화 앞에서 느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순간이 잊히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감동을 저 무채색이 줄 수 있는 것일까요. 그때 그 검은색은 선이 아니라 유화 그림의 배경이고 넓은 면적이었습니다. 그 검은색이 생생한 감동을 전달하고 있었는데 저는 그것이 검은색 물감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물감을 다룬 주체의 자아의식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붓질의 연속적인 면적, 유화 표면의 색은 컴퓨터 화면 같은 지시적 색상만이 아니라 붓질이 이루어질 때마다 작가와 물감이 이루어내는 교감의 축적물입니다. 현미경으로 측면을 본다면 수많은 산이, 골짜기가, 평야가 생기는, 붓과 물감과 바탕재의 투쟁적 축적물인 셈이지요. 원천적으로 유화물감의 표면은 덧붙여진 부조적 지표면입니다. 10년 뒤 2007년, 저는 화려한 색채의 열매가 검은 배경 속에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사라져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유화 작품 <가을 사과>(도2)를 제작하게 됩니다. 세로 250cm 가로 600cm 크기인 이 작품은 이듬해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되었습니다. 2015년에 저는 프랑스 패션기업 디올과의 협업으로 <열두 장미>(도3)를 검은 배경의 유화로 그리게 되었고 그해 이 작품은 파리 루이비통 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습니다. 카라밧지오의 검은색 유화가 저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지요.
유화와 달리, 먹의 검은 색은 수용적입니다. 바닥에 바탕재인 종이나 천을 놓고 그 위로 먹물이 지구의 중력에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면 나무에서 생겨난 속성 때문인지, 더 자연스럽게 또는 덜 투쟁적으로 느껴집니다. 먹을 쓰는 붓도 동물의 털이라서 그런지, 용매제인 물이 흘러가는 성질이 순화적으로 느껴져서인지, 여하간 먹의 검은 색은 유화보다는 덜 투쟁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먹의 성질은 그것만이 다가 아닐 것입니다. 먹은 이제 현대미술의 실험성 안에서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가능성이 매우 많다고 생각합니다.
Q. 한국적 추상, 선에 대하여
추상미술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현대 서양미술사를 배우며 유입된 용어이지만 그것이 지칭하는 바는 원래부터 우리에게 내재된 미학적 요소입니다. 자연미와는 다른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선, 형태, 색채를 인간은 태초부터 표현해왔습니다. 구석기 동굴벽화 등에 나타나는 동물의 형태가 아니라 신석기 토기나 암각화 등에서 나타나는 기하학적 형태들이 그것입니다. 서양미술사에서 등장하는 현대 추상미술은 그 뿌리가 원시미술에서부터 내재한 인간 본연의 예술 충동입니다. 이러한 인간 본연의 예술 의지를 현대에 와서 추상미술이라고 이름 붙여준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적 추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추상은 원래부터 모든 민족 문화에 내재한 본래적 현상입니다. 그런데 각 민족은 문화에 따라 조형적 선호도가 다르게 전개되는데, 산업화를 거치면서 현대에 와서는 마치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개념만이 정답인 것처럼, 추상미술이 새로운 발명품인 것처럼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말하자면 추상미술은 발명품이 아니라 발견품입니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한국의 미술사를 들여다보면 상황은 명료해집니다.
한국은 매우 오래된 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식민사관에 의해 마치 한사군 이전의 한국의 선사문화는 마치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또는 국수주의적인 퇴행적 태도일까 두려운 듯, 공정하게 우리의 과거 문화 또는 과거 미술을 판단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료에 없으니 있지 않은 역사일까요? 글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인간의 문화는 모두 역사가 아닌가요? 기록 문자가 생겨나기 전 이야기인 신화나 전설의 내용은 모두 허구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현대 고고학의 업적이 이것을 모두 증명해 줍니다.
구전설화 등 민족 언어가 문자 이전의 역사를 남겨놓듯이 우리가 문양이라고 부르는 전통 미술 형태는 선사시대의 문화공동체가 가졌던 정신적 상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의미체계는 변색해도 그 형태는 민족문화의 이면에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추상미술의 뿌리이며 한국 미술의 주요 원소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고유한 조형적 선호도를 보이며 특별한 미학적 성과를 이룩한 한국 미술은 이제 현대미술적인 시각에서 재발견하고 재평가되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민족주의적인 시각이라는 비판에 두려워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그 미학적 탁월함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미술은 그 추상성에서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보여준 중요한 미학적 현상 중에서도 놀랄만한 역량과 업적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자연환경 때문인지, 사용 가능한 재료 때문인지, 민족성 때문인지 저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인 유물 또는 조형 작품의 미학적 수준은 놀랍도록 경탄스럽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한국미술은 선이다, 유려한 곡선미가 있다고 하지만 이때의 선은 자연적 형태만을 강조한 곡선이 아니고, 보는 이를 제압하려는 공격적인 직선도 아닌, 직선과 곡선이 상호보완을 이루며 움직이는, 내면의 정신적 가치를 끌어내는, 상징적 형태를 만들어 내는 선입니다. 따라서 무엇을 그려내어도 초월적 가치를 함축한 추상성이 살아나는, 여기 있어도 여기 있지 않은, 이곳에 살아도 저곳에 살고 있듯이, 마음을 다 비우고 물질 위로 그려내는 선입니다. 상징적 행위에 이해도가 높은 사람들의 선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미술은 정말로 민화조차도 본래적 의미에서 추상미술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내는 선이라는 뜻입니다.
Q. 먹선의 밀도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
우리는 2천 년 넘게 먹과 붓으로 글자를 썼던 문화공동체였기 때문에 먹 선이 친숙한 것 같습니다. 손맛이 살아있는 필체가 신선하게 느껴지듯이 붓으로 그린 먹 선은 사람의 온기가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감성적 수사법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합니다. 동물 털로 만든 길고 굵은 붓에 먹물을 가득 담고 선을 하나 그어봅시다.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물의 양에 따라, 팔의 동작에 따라, 잡념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종이가 벽에 붙어 있는지 바닥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형상들이 생겨납니다. 먹이 만들어 내는 선은 계획적이지 못합니다. 순간의 몸동작이 완전히 다른 결과물을 만들기 때문에 정신수양과 비슷한 경로를 보입니다. 호흡을 다스리고 생각을 다스리지 못하면 먹 선을 제대로 실현할 수 없습니다. 컴퓨터로 글을 쓰는 시대이기 때문에 이제 붓글씨는 의사전달이 아닌 상태 전달의 기능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작업을 많이 할수록 빠른 선이 다 속도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느린 선이 다 평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선은 그 물리적 속도와는 별개로 선을 그을 때의 의식의 집중도가 곧 그 선의 밀도를 만들어 냅니다.
Q. 전통문양에서 주목하는 요소
우리가 문양이라고 부르는 형상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고정적 형상, 패턴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장식적 기능의 도상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도상들은 장식적 기능이 아니라 어떤 초기 문화권의 중요한 의미체계를 압축한 기호이자, 자연과 우주를 상징하는, 보이지 않는 개념을 그림으로 간략히 설명하려는 시도로서, 지금의 용어로 보자면 일종의 추상미술입니다. 자연의 이치를 그려보려고 했다든지, 우주의 원리를 그리려고 시도했다든지, 땅에 대한 개념을 표시하고 싶다든지, 하늘이나 무한을 표기하고 싶다든지, 보이는 사물을 넘어 보이지 않는 개념을 그려내려는 시도들이 이러한 상징 문양들이었습니다. 이런 문화공동체의 상징기호가 세상이 바뀌면서 공동체를 표지하는 표식이 되었고 나중에는 초기의 상징 의미가 사라지고 친근하고 익숙한 전통문양이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백년 전 베갯잇 옆면 문양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이어져 온 빗살무늬, 번개무늬, 삼각무늬가 숨어 있고 청동기시대의 엑스자 형태와 고구려 고분벽화의 겹 사각형 도상들도 보입니다. 전통 문양 속에는 수천 년 이어온 옛날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기록문화가 다 채울 수 없는 부분들, 즉 구전으로 이어져 온 민족 저변의 감수성이 전통문양 속에서 소리 없는 부호처럼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형상 중에서 특정 민족이 좋아하는 문양들은 확실히 구별됩니다. 언어가 다르듯 형상에도 선호도가 작동하며 흘러온 것입니다. 거기에는 문자로 기록되지 못한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문자의 역사가 수천 년이라면 인간 미술의 역사는 구석기를 제외하더라도 만 년 이상입니다. 인간의 지능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그림은 문자의 모태적 자양분이 되었고 문양의 형태로 공동체에 지속적으로 남아있습니다. 문양의 통시성에서 저는 민족 고유의 조형감각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오랜 역사의 특별한 미학을 가지고 있음을 저는 전통 문양들에서 발견합니다.
Q. 박물관과 유적지 답사, 문양연구 과정에 대해
미술과 역사를 특히 좋아한 것은 개인의 취향이었지만 독일에서 귀국한 후에는 일종의 책임감으로 가족여행을 갈 때마다 한국의 문화유적지를 찾아다녔습니다. 횟수가 많아지다 보니 시대별 구분이 생기고 지역별 특성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도시별 주요 문화재를 기입한 저만의 여행 메모 카드가 생겨났습니다. 흥미를 느끼는 문화재만을 기입하고 방문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예술적 성과도 컸습니다. 답사 여행을 다녀오면 좋은 작품이 나오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박물관 유물 관찰로 이어졌고, 전시실에 한 번 들어가면 잘 나오지 못하여 박물관 지킴이 분들이 의아스러워 한 적도 더러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유럽의 미술관이나 한국의 박물관이나 다 중요했고 현재는 한국의 박물관에 푹 빠져있는 상황입니다. 제가 고등교육을 받을 때는 전혀 몰랐던 고고학적 유물이 한 세대가 지난 지금 놀랍도록 많이 발굴되어 저를 경탄스럽게 만듭니다. 한 마디로 저는 한국 고대미술과 사랑에 빠진 사람 같습니다. 이토록 창의적인 조형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인지 존경스럽고 궁금해서 선으로 모사해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Q. 문양 드로잉이 평면작업으로 이어지는 과정
한국 고대문화의 문양 드로잉이 수백 장 되어갈 즈음에 이러한 미학 세계를 현대적 미술 어법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겨났습니다. 고대 문양 연구를 작품을 통해 시각적으로 공간적으로 증폭시킬 욕구를 느끼게 된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저의 미적 발견이 진실할지라도 그 결과는 진부한 복고주의, 시대착오적 아집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주장이 옳다고 좋은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실하다고 다 좋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좋은 작업에는 일종의 파격이 필요합니다. 파격을 감당할 용기는 좋은 예술에서 항상 발견되는 어떤 힘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은 어떤 지렛대 같은 것이지요. 이런 집중력이 작동할 때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오곤 했습니다.
Q. <예술과 암호> 전시 시리즈에 대해
미술품의 형태에 감정 이입할 때 선의 흐름에 주목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재료에 따라 거친 선이 되든, 세밀한 선이 되든, 선은 창작자의 예술의지가 즉각 드러나는 일차적 미술 요소입니다. 그러한 선들이 만들어 내는 형상은 창작자가 사는 시대의 문화적 특질을 담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한국 선사 및 고대사가 어떤 불행한 역사적 사건에 의해 패권에 굴복하고 타협하는 과정에서 평가 절하되면서 점차 지우개로 지워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옛날 미술품들은 언어나 문자 이전에 이미지로서 자기 발언을 합니다. 자신의 문화사적 맥락을 즉각 증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2018년 신석기 토기 문양들로 <예술과 암호-빗살무늬>(도5)라는 협업 전시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고, 이듬해에는 전곡선사박물관에서 <예술과 암호-고구려의 기와문양>(도6)으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구석기부터 신석기, 청동기, 철기까지 실용도구의 측면으로 역사를 구획하지만, 사실 그 시대들은 매우 점진적으로 때로는 비연속적으로, 때로는 동시대적으로 병행하면서 진행해온 인류의 긴 과거사입니다. 우리 역사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고조선은 대체로 청동기시대에 해당되는데 그 긴 3천 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빗살무늬 신석기 토기는 고고학 유물로만 남겨두고 청동기는 그대로 건너뛰어 다음 단계인 철기시대 삼국 또는 사국 고대사 얘기만 합니다. 그 긴 기간 우리의 선조들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예술품을 남겼을까요?
저는 이 부분이 너무나 궁금했었기 때문에 이 시간적 간극에 놓여있는 민족 공동체적인 조형적 이미지들을 연구하여, 2020년 <예술과 암호-고조선>(도7)이라는 연작을 제작하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엔 청동기시대 곧 고조선시대와 겹치는 기간이자 그 구체적 표식인 고인돌의 그림들을 답사하여 <예술과 암호-고인돌의 그림들>(도8)을 제작하여 발표하였고, 이번 전시에서는 더 세분화하여 청동기와 초기철기 삼한시대를 지시하기 위해 <예술과 암호-마한의 새>라는 주제로 전시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시기에는 실제로 한반도에 많은 소국이 있었습니다. 이 소국들은 정치적 군사적 규모는 작았을지 모르지만 남겨진 미술품들은 정말 미학적입니다. 제 눈에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예술품 평가를 못 받아본, 마치 동화책 『미운오리새끼』의 백조처럼 보입니다. 물론 오리가 백조보다 못하다고 보는 시각도 편견에 불과하지만요.
Q. 2부 <정적의 소리> 창작과정에 대해
박물관 기획실의 1부 전시를 ‘마한의 새’로 지시했다면, 한옥으로 이루어진 별관인 삼각산금암미술관의 전시는 암각화와 먹의 만남이라는 회화적인 문제로 진행하게 됩니다. 나주, 임실, 삼척을 직접 답사하고 탁본한 고대 이전의 암각화들을 그 조형적 가치에 집중하여 먹으로 극대화한 작품들을 <문양 연구>와 <삼척 실직국>이라는 제목으로 1층에서 발표했습니다. 이어서 한옥의 2층에 올라가면 <정적의 소리>라는 먹과 붓, 한지와 나무판, 송곳과 풀 등을 활용한 실험적 작품들로 전시가 마무리됩니다.
제목을 ‘정적의 소리’라고 한 이유는 독일 베를린에 있는 제 작업실에서의 경험에 있습니다. 독일은 숲을 잘 가꾸고 보존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숲의 생명력은 인간 생존에 공기와 같이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여가활동의 공간이 아니라 인류 생존과 직결되는 지구적 조건입니다. 울창한 숲 한가운데 있는 제 작업실에서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다 보면 정말로 정적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대화하는 것이 아니니 사람의 목소리도 아니고, 또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먼지 같은 잡념의 소리도 아닌, 적막한 듯이 느껴지나 실은 거대한 자연이 만들어 내는 웅장하고도 매우 고요한 생명의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집중하면서 그린 대형 작품들로 2019년 초 독일 드레스덴 쿤스트할레에서 개인전을 했는데 그때의 전시 제목이 <정적의 소리-독일 숲>(도4)이었습니다. 이후 한국에서 마주한 유적지인 반구대 등의 작품에도 <정적의 소리-반구대>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제가 그림을 그리는 동작과 그 결과물인 작품이 지구 위의 특정 시공간과 대상에 대한 자각과 경외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지속적으로 <정적의 소리> 시리즈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나 기계음을 멈춘 상태에서 비로소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의 소리에는 하늘, 구름, 바람, 별뿐 아니라 진실된 예술품의 소리까지 포함됩니다.
Q. 삼척의 암각화를 모티프로 한 <삼척 실직국> 시리즈에 대해
마한이라는 시대, 또 다른 말로 삼한시대라고 지칭된 그 시대에 실제로 한반도에는 수많은 흥미로운 소국들이 있었음을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는데요. 문자 기록에는 있으나 시각적 경험으로는 우리가 겪기 어려운 시대인데, 전국의 유적지 답사를 십 년 넘게 하다 보니 의외의 발견, 학계에는 아직 알려진 것 같지 않은 암각화를 발견할 때가 있었습니다. 지난 가을, 삼척의 죽서루 인근의 암각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성혈이 새겨진 큰 바위가 아니라 그 근방에 숨어 있는 아주 작은 기하학적 그림의 암각화를 발견하고 이를 탁본하여 자세히 관찰해 보았습니다.(도11) 현대예술은 학문적 성과에 큰 도움을 받지만 때로는 학문적 논리체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새로운 시각으로 틈새 인식을 하기도 합니다. 경상남도 남해군 벽련마을 여행 중에서 발견한 암각화,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것 같으나 제 눈에는 너무나 중요한 시각적 자료인 숨은 바위 그림에서 기획실 천장에 설치된 먹 작품이 나왔던 것처럼, 삼척의 숨은 바위 그림에서 삼척 실직국이라는 대형 먹 작품들이 나왔습니다. 이 바위 그림이 저의 흥미를 끄는 이유는 2년 전 동해안 여행에도 비슷한 시각적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관령박물관이라는 곳에서 강원도 민간지역에서 수집된, 자수로 이루어진 <가마장식술>(도9)의 문양을 자세히 관찰하다가 놀라운 점을 발견했었습니다. 한글의 구조적 성질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바람개비 문양같이 힘이 있기도 한, 기하학적 조형미의 조그만 자수 문양이었는데 이 삼척 바위 그림의 조형적 구성이 그것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신라에 정복되지만 동해 및 삼척에 실제로 있었던 실직국의 이름을 작품 제목으로 인용함으로써 연해주의 옥저에서부터 동해안의 동예로 이어진 고대 한국문화권의 조형미를 소환시키고 싶었습니다.
Q. <삼척 실직국>과 <나주 운곡동> 시리즈의 표현기법
문양 연구라는 주제로 캔버스 천을 바닥에 놓고 그렸지만 <나주 운곡동> 시리즈(도10)는 천의 앞면, 즉 유화의 기름이 천에 침투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바탕재로 미리 칠해지는 하얀 제소가 있는 앞면에 그렸습니다. 따라서 먹물의 수분이 천 사이로 흘러내리지 못하고 캔버스 천 하얀 표면 위에서 서서히 마르게 됩니다. 이때 물은 추가적으로 먹과 서로 뒤섞이며 아주 천천히 마르기 때문에 가로 200cm 세로 200cm라는 마당 같은 표면 위에 수채화 같은 효과가 극대화됩니다. 반면 <삼척 실직국> 시리즈(도11)는 제소 칠이 없는 아사천의 뒷면에 직접 그려짐으로써 물기가 순식간에 중력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립니다. 천의 두께만큼 아래로 흘러내린 물기는 천의 반대편에 있는 제소 칠 부분에 닿으면서 번지면서 비로소 멈추게 됩니다. <나주 운곡동> 시리즈의 물기는 제소 표면 위를 흘러가면서 먹과의 우연적인 뒤섞임으로 추가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면 <삼척 실직국> 시리즈의 물기는 바로 아래로 흘러 내려가 처음 붓질의 먹색만이 생생하게 그대로 남아있게 됩니다.
Q. 먹 작업의 확장성과 앞으로의 구상
먹의 바탕재로 저는 한지뿐 아니라 면천, 아사천, 모직천 그리고 나무판도 사용합니다. 부분적으로 아크릴 단색을 추가한 경우도 있지만, 언젠가 유화물감이 먹과 합쳐지면 정말 흥미로운 작품이 나올 것 같습니다. 물론 작품의 동기부여는 실험적 재료에서 오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상 또는 주제에 대한 설렘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고고학적 유물의 상징연구는 계속될 것 같습니다. 한반도, 요동반도,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메소포타미아 등 흥미진진한 소재가 매우 많습니다.
Interview with Heryun Kim
On the artistic career in Germany and early oil paintings
I originally majored in German Studies, but also took fine art classes because I became convinced that images were more immediate and important than language or writing, and eventually, majored in Western art theories in graduate school. In those days, I realized that I was specially sensitive to lines, colors and forms, and in particular, that stark color contrasts in German expressionism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stimulated a certain primitive and existential thirst in myself. With a master’s degree in art theory, I decided to become a real painter, and left for Germany to enter the undergraduate program at Berlin University of the Arts in order to study art techniques. As my oil paintings received very good reviews at the graduation exhibition, I was given a chance to hold my first solo exhibition at the Galerie am Savignyplatz in Berlin upon the recommendation of my academic advisor, Prof. Klaus Fussmann. It was well reviewed by two German daily newspapers, Berliner Morgenpost and Der Tagesspiegel. At that time, while most of my oil paintings were still lifes reminiscent of Vincent van Gogh’s or Henri Matisse’s, I also drew portraits and landscapes at times, and used to deepen my figurative thinking about artistic objects by drawing in Korean ink whenever I encountered new materials.
Oil paint is very difficult to use. It takes a long while for oil paint to dry up, so you have to find a way to deal with it before the surface hardens, when washing a dirty brush or mixing different colors. It is difficult for painters to create their own unique colors with oil paint within the laws of physics. In experimenting with oil paint, however, I was not afraid of failure from the start because I was more interested in processes than results. Why are you afraid of failure if you enjoy the process of making brush strokes more than its results? From the beginning, it amused me to learn about the physical properties of oil paint, such as the characteristics of brush strokes, the juxtaposition of colors and the creation of space, so I could continue to work on oil paintings. To me, the attraction of painting was experimental processes, like stepping into a jungle. Without any plan for completion, I only pursued the joy of discovery and the pleasure of perception so that I could work without exhaustion (Figure 1).
In extreme cases, it takes even a few months for thick oil paint to dry up completely, while acrylic paint dries up in one or two hours. It is really convenient. This convenience, however, did not appeal to me, so I mainly used oil paint for color painting. The slow drying process of oil colors looked like an organism to me, and gave me some free time to make figurative explorations slowly.
On the motive for Korean ink drawing
Since my student years in Berlin, I have worked with two kinds of material, oil paint and Korean ink. As acrylic paint did not appeal to me, I have always used oil paint for color painting. Oil paint, the traditional material of Western art, is becoming less and less popular because of its inconveniences, and so is Korean ink because it easily gets moldy in storage. Yet, I have used both of them for a long time until today. From my perspective as a painter, it is not that I have changed my material from oil paint to Korean ink, but that I want to use Korean ink like oil paint and oil paint like Korean ink.
On the difference between black oil paint and black Korean ink
In general, black in oil paintings looks murky and stiff, giving a sense of suffocating despair when painted on a large plane. In addition, with a film of oil on the surface, its impression matches our negative feelings projected on the color. In other words, it looks like lacking vitality. It is a color that is not colorful, devoid of energy that a color can give, so a plane painted in black looks rather colorless and achromatic. In the history of Western art, however, the color black once emerged as a leading stylistic element. During the Baroque period in the seventeenth century, Michelangelo da Caravaggio created the style of tenebrism (derived from the Italian ‘tenebroso’ which meant dark) characterized by the dominance of dark backgrounds and extreme contrasts of light and dark colors. In 1997, as a doctoral student in art at the Berlin Institute of Technology located next to Berlin University of the Arts which I had graduated from, I went on a field trip to Rome with my academic advisor, the late Prof. Dr. Robert Suckale, for eleven days. In front of Caravaggio’s oil paintings in the tenebrist style, I was deeply moved and stunned by his breathtaking masterpieces. Black in his oil paintings was as vivid as any other flamboyant color in the world, and its vitality was more spiritual and existential than physical and organic, expressing his intense self-consciousness as if he had looked squarely at death and tried to transcend it. I still cannot forget that moment. How could an achromatic color touch my heart so much? In Caravaggio’s oil paintings, it was not lines but backgrounds and large planes that were painted in black. As to why the dark color conveyed such a vigorous impression, I think that it was not only a matter of black paint, but also relevant to the self-consciousness of the subject who painted the color. Painted by numerous continuous brush strokes, colors on the surface of an oil painting are the accumulation of communications between the painter and oil colors made by each brush stroke, unlike colors on the screen controlled by computers. If observed from the side with a microscope, the surface will show countless mountains, valleys and fields resulting from accumulated struggles among the brush, the paint and the background. Fundamentally, the surface of an oil painting is that of bas-reliefs. After ten years, in 2007, I painted Autumn Apple (Figure 2) in oil which represented a colorful fruit gradually disappearing in time against a dark background. In the size of 250cm x 600cm, this painting was collected by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in the following year. In 2015, in collaboration with the French fashion company Dior, I also painted Twelve Roses (Figure 3) in oil against a dark background, which was collected by the Louis Vuitton Foundation that year. Indeed, Caravaggio’s dark oil paintings had a deep influence on me.
On the other hand, black in Korean ink paintings looks receptive. If I drop Korean ink on a paper or cloth background on the floor, ink drops will fall down according to the law of gravity in a way that feels more natural or less aggressive probably because of the nature of Korean ink originally made from trees. It may be due to traditional brushes made of animal fur, or due to the nature of water solvent that gently flows, and in any case, the color black of Korean ink looks less aggressive than that of oil paint. Still, it is not the only characteristic of Korean ink. In my opinion, there is a great possibility that Korean ink will rise to a new level as an artistic medium in the experiments of contemporary art in the future.
On Korean abstract art and lines
The concept of abstract art was introduced to Korea as the nation began to learn contemporary art history of the West, but the referred aesthetic style has always been inherent in Korean art. From the beginning of time, human beings have expressed their feelings through lines, colors and forms, distinct from natural beauty and endowed with symbolic meaning. It is manifested in geometric forms found in Neolithic earthenware and petroglyphs, distinguished from animal forms found in Paleolithic cave paintings. Contemporary abstract art in Western art history is also rooted in the artistic impulse of intrinsic human nature inherent in primitive art. This human quest for art came to be named as abstract art in modern times. Thus, Korean abstract art is not an independent phenomenon, but in line with universal abstract art inherent in all national cultures from the beginning. Then, each nation has taken a different path according to the figurative preference of each culture, but with the advent of industrialization, a misleading idea has emerged that abstract art is the new invention of the West, as if concepts from Western art history were the only correct answers. The point is that abstract art is not an invention but a discovery. If you look into Korean art history based on this premise, the situation becomes clear.
Korea has a very long history and culture of its own. In these days, however, Koreans tend to avoid evaluating their traditional art and culture fairly, especially when it comes to Korean prehistoric culture before the period of the Four Commanderies of Han (from 108 B.C. to the early fourth century), as if they were suffering from collective amnesia under the influence of the colonial view of history, or as if they were afraid to be accused of being nationalistic or anachronistic. Is it reasonable to deny history because it has no written records? Is it reasonable to assume that all human cultures without written records are not history? Is it reasonable to assume that all myths and legends, that is, stories born before the invention of writing, are fictional? The answer is no, of course. The achievements of modern archeology prove it all.
As the history of the Korean nation before the invention of writing was handed down by their language in the form of oral folk tales, the traditional forms of Korean art, or patterns as we call it today, tell us about the spiritual symbols held by the prehistoric cultural community of Koreans. The semiosis has changed, but the forms have survived on the hidden side of the nation’s culture until today. This is the root of abstract art as well as a major element in Korean art. Over a long period of time, Korean art has achieved special aesthetic results with distinctive figurative preferences, and it is time that it should be rediscovered and reevaluated from the perspective of contemporary art. There is absolutely no need to be afraid of criticism that it is a nationalist view because the aesthetic excellence of Korean art has certainly not been properly respected yet. In terms of abstractness, Korean art has shown remarkable power and achievements, compared to other major aesthetic phenomena shown by mankind since prehistoric times. I cannot tell whether it was made possible by natural environment, or by available materials or by the national character. All I can tell is that the aesthetic level of the resulting artifacts is surprisingly marvelous.
They usually say that the essence of Korean art lies in its lines, praising the beauty of elegant curves. These curves are neither simple curves emphasizing natural forms, nor aggressive straight lines dominating viewers. Rather, they express symbolic forms in which straight lines and geometric curves are moving in complementary cooperation in order to reveal inner spiritual values. Thus, those who created such lines must have drawn them on available materials with an empty mind, as if they had existed there but simultaneously not existed, or as if they had lived in one place but simultaneously lived in another. Consequently, they were able to convey abstractness and transcendental values in whatever they drew. Such lines could be created only by those who understood symbolic action to a great extent. In this respect, Korean art, including even folk paintings, is abstract art in its original meaning. It means that lines represent the invisible in Korean art.
On creating density in Korean ink lines
Koreans are naturally familiar with Korean ink lines because their cultural community has been using Korean ink and brushes for writing for about two thousand years. As handwritten letters feel fresh because they convey the writers’ personalities, Korean ink lines drawn with a traditional brush vividly convey the human touch. This is not emotional rhetoric but a truth in reality. Let us draw a line with a long thick brush made of animal fur fully soaked in Korean ink. Then, we will see unexpected incidents happen. Totally different forms will emerge according to many conditions; the amount of water, the movement of arms, whether we are concentrating or distracted or whether the paper is placed on the wall or on the floor. Like this, Korean ink lines cannot be premeditated. As an instant body movement may lead to totally different results, the way of line drawing is similar to that of mind discipline. We cannot draw a proper line unless we control our breaths and thoughts. In this age of computers and electronic writing, calligraphy seems to function as a medium of communicating conditions, rather than as that of communicating ideas. The more we practice, the more we realize that fast lines are not necessarily speedy, and that slow lines are not necessarily peaceful. Without regard to physical speed, the density of lines depends on the concentration of consciousness at the moment of drawing.
On the noteworthy elements of Korean traditional patterns
Most of the traditional forms, or patterns as we call it today, are fixed forms handed down for centuries, namely, icons serving an ornamental function. In the past, however, the function of these icons was not ornamental because they were symbols epitomizing the important semiosis of an early cultural community, and also efforts to give concise explanations about invisible concepts, such as nature and universe. In today’s terms, they are a kind of abstract art. When describing the order of nature, the workings of the universe, the concept of land or the infinity of the sky, they tried to visualize invisible concepts beyond visible things through symbolic patterns. As times changed, these symbolic signs of the early cultural community came to represent the community itself, and eventually lost their initial symbolic meaning to turn into familiar and friendly traditional patterns. For example, there is a hundred-year-old pillowcase that has embroidered patterns on its sides, in which the Neolithic patterns of comb, lightening and triangle are hidden, along with the X-pattern from the Bronze Age and the double-square pattern from the ancient tomb murals of Goguryeo. Thus, thousands of years of old stories are hidden in Korean traditional patterns.
Some parts missing from written history, that is, the orally inherited collective sensibility, are hidden in traditional patterns, like silent signs. A nation’s favorite patterns are clearly distinguished from countless other forms. As language differs from nation to nation, forms have also been selected according to national preferences. The unrecorded history is hidden in them. While the history of writing is a few thousand years long, the history of human art is more than ten thousand years long, even when excluding the Paleolithic Era. In the development of human intelligence, paintings set the stage for the invention of writing, and have continued to survive in the form of patterns in national communities. I can see the intrinsic artistic sense of Koreans in the diachronic forms of traditional patterns. Korean traditional patterns prove the fact that the nation has its own special aesthetics rooted in its long history.
On the exploration of museums and historic sites in symbol studies
Personally, I am particularly fond of art and history, and after my return from Germany, I took family trips to historic sites in South Korea with a sense of responsibility. The more I explored, the more I learned about periodization and regional characteristics. Before I knew it, I had my own travel memo cards filled out with major cultural properties of each city. Only those cultural properties which interested me were written down in memos, so my visits had fruitful artistic results. I used to come out with satisfactory works after each field trip. Later, it lead to the observation of antiquities in museums, and I used to stay in exhibition rooms so long that some museum staff were baffled from time to time. To me, both European and Korean museums were equally important, and I am now devoted to exploring Korean museums. I am amazed that an astonishing number of archeological artifacts, which I was unaware of during my school days, have been excavated during only one generation. In a word, I am in love with Korean ancient art. With much respect, I wondered how such creative forms had come into being, and could not help making line drawings about them.
On the development from pattern drawings to paintings
By the time I had made hundreds of drawings on Korean ancient patterns, I began to feel a responsibility to translate this aesthetic world into the contemporary artistic grammar. In other words, I came to have an urge to amplify my knowledge on ancient patterns through my works visually and spatially. Otherwise, it would most likely end up in a reactionary cliche or anachronistic stubbornness, no matter how sincere my aesthetic discovery might be. Good arguments do not necessarily produce good art. As sincerity does not necessary lead to good art, the production of good art requires a kind of extraordinary breakthrough. Courage to cope with it comes from certain power discovered in all good art. It is a kind of lever based on self-belief. I used to create satisfactory works when I had such concentration.
On the exhibitions of the Arts and Code series
I have spent much time focusing on the flow of lines when appreciating the forms of artworks with empathy. Lines are a primary artistic element immediately revealing the artistic will of a painter, whether they are rough or elaborate according to the nature of material. The forms made by those lines inevitably reflect the cultural peculiarities of the times that the painter lives in. I think that the prehistoric and ancient history of Korea has been gradually erased because Koreans began to undervalue its importance after their surrender to and compromise with hegemonic powers, forced by certain unfortunate historical events in the past. Ancient artworks, however, speak for themselves through images before language and writing. They spontaneously prove their cultural context. In 2018, I held a collaborative exhibition on the pattern of Neolithic earthenware under the title Arts and Code: Comb Pattern (Figure 5)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and also a solo exhibition Arts and Code: Roof-Tile Patterns in Goguryeo (Figure 6) at the Jeongok Prehistory Museum in 2019. In general, the entire human history is periodized by the nature of practical tools, from the Paleolithic, Neolithic, Bronze and Iron Ages, but in fact, these periods have progressed slowly and gradually in the long history of mankind, sometimes discontinuously and sometimes contemporarily. The same is true of Korean history. The first Korean state, Gojoseon, existed during the Bronze Age on the whole, but today’s Koreans seem to be allergic to the three-thousand-year-long history of this ancient kingdom. They think of Neolithic comb pottery as mere archeological antiquities and pay little attention to the Bronze Age, while only focusing on the following phase of the Iron Age dominated by the three ancient kingdoms (Goguryeo, Baekje and Silla) or by the four ancient kingdoms (with Gaya included). During such a long period before the Iron Age, how did Korean ancestors live? What kind of artworks did they make?
My curiosity about this issue drove me to study figurative images found in the antiquities of Korean ancient communities during this time span, and my works on this subject were presented at the exhibition Arts and Code: Gojoseon (Figure 7) in 2020. In the following year, I held another exhibition Arts and Code: Petroglyphs on Dolmens (Figure 8), presenting my works done after research and exploration on dolmens and petroglyphs, which were concrete signs of the Bronze Age that Gojoseon belonged to. Then, for the current exhibition, I further subdivided historical periods, and chose the title Arts and Code: Birds of Mahan in order to specifically refer to the period of the Three Han States during the Bronze and early Iron Ages.
As a matter of fact, there existed many small political entities on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is period. Their political and military presence was rather small, but their remaining artworks are truly aesthetic. In my eyes, they look like the swan in The Ugly Duckling as they have never been appreciated properly as art, although it is only a prejudice that ducklings are below swans, of course.
On the making of The Sound of Silence series in the Part II of the exhibition
The first part of this exhibition, Birds of Mahan, is displayed at the main building of the Eunpyeong History Hanok Museum, while the second part is displayed at its annex at the Samgaksan Geumam Art Museum, a beautiful hanok (traditional Korean house). The latter deals with the artistic issue of the encounter between petroglyphs and Korean ink. The paintings of two series, Pattern Studies and Samcheok Siljikguk, are exhibited on the first floor of the annex, for which I took field trips to Naju, Imsil and Samcheok in order to take rubbings of prehistoric petroglyphs, and maximized their figurative value in Korean ink paintings. Then, on the second floor of the annex, the experimental paintings of The Sound of Silence series are exhibited, made with various materials, such as Korean ink, brushes, awls and glue on Korean paper or wood.
The title of The Sound of Silence came from my experience in my studio located in Berlin. Germany is well known for cultivating and preserving forests, and the vitality of forests is an essential condition for human survival, like breathing air. Forests are a global prerequisite for human survival on earth, rather than a space for leisure activities. While painting all day in my studio in the middle of a dense forest, I really heard the sound of silence. It was neither a human voice as it was not a conversation, nor the sound of dustlike, distracting thoughts in my head. Instead, I sometimes heard the sound of life, a very quiet but also majestic sound made by immense nature. Concentrating on that sound, I worked on a series of large oil paintings, which would be presented at a solo exhibition at Dresden’s Kunsthalle Lipsiusbau in early 2019, under the title The Sound of Silence: German Forest (Figure 4). Later, in South Korea, I worked on another series of large oil paintings based on the motif of the historic petroglyphs engraved on a rock terrace called Bangudae, and also named it The Sound of Silence: Bangudae. Then, I realized the fact that both my action of painting and the resulting works were based on my self-awareness and a sense of awe vis-a-vis a particular object at a particular time and space. From then on, I have continued to work on The Sound of Silence series. We cannot hear the sound of nature unless all human languages and machine sounds stop completely. Then, we can hear the sound of nature, including the sounds of the sky, clouds, stars, wind and even true artworks.
On the series of Samcheok Siljikguk based on the motif of petroglyphs
During the Mahan period or the period of the Three Han States, there existed numerous interesting small political entities on the Korean Peninsula, according to The Chronicles of the Three States (published in 1145). Their existence is documented in historical records, but it is difficult for us to have a visual experience about their culture. Personally, while taking field trips to historic sites all over South Korea for more than ten years, I unexpectedly discovered new petroglyphs on occasions, which seemed to be unknown to scholars yet. Last fall, I visited Jukseoru in Samcheok to see petroglyphs on a huge rock widely known for its sacred holes. Then, at a short distance from the famous rock, I also found a very small, hidden petroglyph with geometric images, and took a rubbing of the stone for a closer look (Figure 11). Contemporary artists get great help from academic achievements, but sometimes get a chance to perceive things from a new perspective because they are free from academic logics. From the hidden petroglyph in Samcheok came the large Korean ink paintings of the Samcheok Siljikguk series, just like the Korean ink paintings hanging from the ceiling in the exhibition hall of this museum came from another hidden petroglyph discovered during my field trip to the Byeokryeon Village in Namhae in the North Gyeongsang Province, which seemed to be unknown to scholars, but nevertheless became a very important visual reference to me. The petroglyph in Samcheok particularly interests me because I had a similar visual experience during my field trip to the eastern coast two years ago. At the Daegwanryeong Museum there, I discovered an amazing aspect when closely observing a pattern embroidered on the Palanquin Tassel (Figure 9) collected from a private location in the Gangwon Province. It was a small, geometrically balanced pattern that seemed to resemble the structure of hangeul or the form of a powerful pinwheel, and its figurative composition was very similar to that of the petroglyph in Samcheok. By citing the name of Siljikguk, which really existed in the region of Donghae and Samcheok but came to be conquered by Silla, in the title of my series, I want to recall the figurative beauty of ancient Korean culture that once flourished in the region from Okjeo on the East Siberian coast of the Pacific to Dong-ye on the eastern coast of Korea.
On the artistic technique used in Samcheok Siljikguk and Naju Ungok-dong
The paintings of both series, Samcheok Siljikguk and Naju Ungok-dong, deal with the subject of pattern studies, and I painted them on canvases placed on the floor. In the case of Naju Ungok-dong (Figure 10), I painted on the front side of canvas preliminarily painted with white gesso in order to prevent oil from permeating the linen cloth. Accordingly, water-based Korean ink did not permeate the cloth, but instead, slowly dried on its white surface. In this process, water was additionally mixed up with Korean ink on the surface and dried extremely slowly so that the watercolor-like effect was maximized on the huge canvas in the size of 200cm by 200cm. On the contrary, in the case of Samcheok Siljikguk (Figure 11), I painted directly on the back of the cloth without gesso so that water instantaneously permeated it and flowed downward according to the law of gravity. It did not stop flowing down through the cloth until it reached the other side of canvas painted with gesso. While water in Naju Ungok-dong spread on the surface painted with gesso and got mixed up with Korean ink with accidental effects, water in Samcheok Siljikguk flowed down directly to the other side of canvas, leaving the initial black brush strokes vivid and intact.
On the potential of Korean ink painting and future plans
As the background of Korean ink paintings, I use not only Korean paper but also cotton cloth, linen cloth, woolen cloth and wood panels. I have partially used a single acrylic color in some of my oil paintings, and also have expectations that mixing oil paint and Korean ink will produce really interesting works someday. Experimental materials motivate me to pursue new ways, of course, but it is more important to find an object or a subject that makes my heart flutter. I will continue to study the ancient symbols of archeological artifacts in the future. There are many places with exciting materials, such as the Korean Peninsula, the Liaodong Peninsula, Siberia, Central Asia and Mesopotamia.
Translated by Sohn Jun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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