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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of course, painterly treatment of colour, but this, again, is managed in the same way. By concentrating on the elements and their relations which are “core” ones, indispensable and necessary ones, by concentrating on the representation of what things are and how they can be represented in a focused way, Heryun Kim achieves this quality of QUIDDATAS of “whatness”. She shows what is, not what could also be. 15th and 16th century Persian miniatures, like the illustrations for the Shah nameh made for Shah Thamasp, go about it completely the other way. They construct an image of reality by representing detailed systematic schemes of signs. A different way to come to whatness. And sometimes a completely different one. But here, we find an uncommon spirit of purity, much akin to what has in early modernism been termed the “spiritual” in art.
김혜련은 표면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중세의 신학자) 와는 뚜렷한 관련이 없는 듯하지만, 예술분석에 있어서 토마스주의자 (Thomist; 아퀴나스의 추종자) 들의 접근방식은 그녀의 작품에도 잘 적용될 수 있다.-이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학가라고도 할 수 있는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에도 반영된다- 이는 예술분석에 있어서 가능한 여러 접근방식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 작가에 있어서는 그러한 접근방식을 통한 분석이 드물게도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클라리타스 (CLARITS) 즉 명쾌함(clarity), 맑음 혹은 투명함(clearness) 을 포함한 세 단계로 이루어졌는데, 예술은 클라리타스에 도달함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기 위하여서는 일차적으로 콘조난티아(CONSONANTIA) 즉 공명 (consonance), 조화 (harmony) 에 도달해야 하며, 이것이 갖추어졌을 때 궁극적으로는 퀴디타스 (QUIDDITAS) 즉 사물의 본성(whatness) 에의 자각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조화를 거쳐 맑음에 이르고, 궁극적으로는 사물의 본성에의 자각 즉, ‘물 자체’ 혹은 ‘진면목’ 에 도달한다는 이러한 입장은 묘하게도 선 불교에서 일컫는 오도(悟道)의 체험과도 연관이 있다.
‘올바른’ 시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 작품소재를 회화적 요구에 순종시키는 것, 그리고 순수회화의 본질적인 ‘평면성’, 이런 것들이 복합되어 해체주의의 기본요소를 이룬다. 그러나 해체주의는 해체하는 것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해체주의 또한 건설하고 구성하며, 확연하고 유용한 무엇인가를 남기는 것이다. 마치 해체주의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 (Daniel Libeskind) 가 종국에는 유용한 건물을 남기는 것처럼, 김혜련의 해체주의적 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확실한 미적 경험을 가능케 하며, 바로 손에 쥘 수 있는 산물로서의 회화와 소묘를 남기는 것이다. 김혜련의 해체주의적 접근방식은 해체주의적 ‘그림’ 자체보다는 오히려 모더니즘을 포함한 전통적인 표현 양태에 그 기조를 두고 있다. 때문에 그녀의 작품에 있어서 전통적 분석수단은 여전히 잘 적용될 수 있다. 재구성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생물학적 배경 즉, 두뇌의 시각정보 처리과정을 포함한 우리의 시각기관일 뿐, 우리의 사물을 보는 습관은 얼마든지 재구성 될 수 있다.
주로 나무의 가지나 줄기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선을 사용하여 그런 그녀의 ‘추상적 작품에서는, 굵은 선을 통해 열려 있거나 닫혀 있는 화면의 각 부분들이, 화면의 네 테두리가 가지고 있는 기본 속성이자 중요한 역할이라 할 수 있는 ‘선’ 이라는 요소와 역동적으로 어우러져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그림 속에서 한 실체 내지 존재로서의, 또 한편으론 영원한 것의 한 편린으로서의 이미지를 보게 된다. 샘 프란시스(Sam Francis) 는 그의 많은 그림에서 그림의 중앙을 비워둠으로써 이러한 효과를 나타내려고 노력하였으나, 김혜련은 이미지가 하나의 총체로서 살아 숨쉬게 함으로써 이를 성취하고 있다.
한편 그녀의 풍경화는 다른 접근방식을 보여준다 여기서 조화는, 회화적 형식에 관한 한, 병렬화 혹은 평행화(parallelization) 를 통하여 성취된다. 여기선 주로 세 개의 넓은 띠가 마치 유럽 나라 국기의 삼색 무늬처럼 수평으로 펼쳐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 띠들은 상호작용하며 각기 다양한 색상으로 변주되는데, 이들이 어우러져 종종 진귀한 화음을 연출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색을 씀에 있어서 푸생 (Poussin) 처럼 기본적으로 선으로 구획 지워진 영역을 드문드문 색칠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지는 않다. 어떤 영역에 칠해진 색은 전적으로 그 영역이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상응하고 있는데, 이는 형태자체가 불분명하게 퍼져있는 경우에서조차 그러하다. 이 작가에게 있어서 색과 형태,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영역과 영역 사이에 종종 나타나는 윤곽선의경우, 그것은 단지 순수하게 채색된 그 무엇 사이의 가상적인 경계로만 지각될 뿐이다.
또한 그녀의 풍경화에서는 - 흔히 그녀의 풍경화 (landscape) 가 바다를 소재로 하기에, ‘해경화(海景畵seescape)’ 라 불러도 좋으리라 - 곧잘 선으로 그려진 풍물(風物) 혹은 채색된 풍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림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 그림의 주제를 통하여, 이런 것들이 곧 산책길이나 방파제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는데,이런 것들은 이른바 ‘주의전환자(distractor)’ 의 역할을 한다. 주의전환자의 역할은 최소한 두 단계로 표현될 수 있다. 그 첫 번째 역할단계는, 자기자신에게로 주의를 끄는 것, 그럼으로써 그림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스스로를 이질화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독자적으로는 존재할 수가 없다. 때문에 두 번째 역할단계는, 자기자신과 그림의 나머지 부분을 대비시킴으로써 결국엔 그림에 대한 더욱 총체적인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전환자’는 구성에 있어서 비독립적인 요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 자립해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령 ‘하늘’임을 시사하는 파랗고 넓은 띠는 그 자체로서 홀로 존재할 수있으며, 하나의 독립적인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그림에 있어서 이 투명함(clarity)은 그림 속에 펼쳐지는 이미지를 하나의 완전한 짜임새로 단장하는 역할을 한다. 그녀의 투명함은 우리가 종종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의 물감을 흩뿌리는 기법에서 보는 바와 같은, 어떤 많은 것 속의 투명함과는 대비되는 적은 것 속의 투명함이다. 그림 속의 각 부분들의 관계는 명확한 초점을 가지고 있으며, 시각적인 교란으로 화면을 모호하게 만들려는 태도는 없다. 또한 색채를 회화적으로 처리함에 있어서도 이러한 투명함이 담겨 있음을 볼 수 있다. 김혜련은 그림의 각 요소들과, 그 요소들의 핵심(core)에 내재하는 필요불가결하고도 본질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몰입함으로써, 그리고 사물의 본질 자체(what things are)를 표현하는 일과 그것이 또한 어떻게 밀도 있게 재현될 수 있는가 하는 일에 몰입함으로써, 이 같은 퀴디타스(QUIDDITAS) 즉 ‘물자체(whatness)’ 내지 사물의 ‘진면목’ 의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 작가는 사물의 ‘무엇일 수 있음 (what it can also be)’ 이 아닌 ‘무엇임 (what is)’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김혜련의 작품에서 보기 드문 순수함의정수 (spirit of purity)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초기 모더니즘 예술에 있어서 ‘스피리츄얼(spiritual)’ 한 것이라 일컬어지던 것과 아주 흡사하다.이 ‘스피리츄얼’ 하다는 것엔 이중적 의미가 있다. 그것은 독일어에서 ‘가이스티히(geistig)’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의 ‘스피리츄얼’한 것인데, 이는 곧 학식, 사상, 정신과 관련이 있다. 한편 그것은 명상적 의미에서 ‘스피리츄얼’ 곧 ‘영적’인 것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바로 이것이 김혜련의 작품을, 모든 분명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마르크 로드코(Mark Rothko)와 같은 작가의 그것에 비견하게 만드는 점이다.
소묘 작품들은 한층 더 함축적 (reduced)이다. 그 형태가 극히 유사하며 서로 유대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는 작품군(群)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작가는 같은 ‘소재’ 혹은 같은 ‘인물’을 각기 다른 한지 위에, 그 테두리로부터 각기 다른 간격을 가지게끔 배치함으로써 다양한 미적 표현가능성을 섬세하게 강조하고 있다. 거리 혹은 간격 (distance), 밀착(closeness), 접촉 (contact), 이동 혹은 변환(transition) 등이 작품의 기조를 이루는 개념들인데, 이 모든 것들이 단 한 개의 소묘작품 안에 일시에 반영되기도 한다. 이 같은 미적 표현 자체에의 고도의 집중과 몰입은 동.서양미술을 막론하여 그리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이러한 것에 대한 시도가 과거에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작가의 작품에서 그러한 양식이 온전히 새로이 정의되고 새롭게 펼쳐지는 것을 우리가 목격할 수 있기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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