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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련의 회화적 의미와 과제
윤우학<미술평론가, 충북대학교수>
"나는 여인을 그리지 않는다. 다만 여인의 그림을 그릴 따름이다." 라는 마티스의 말 속에는 현대회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자리 잡고 있다. 사실 현대회화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무엇이며 그 특징은 어떠한 것인가를 단도직입으로 질문하는 사람들의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곤란하고 난처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고 또 사실상 창작의 주체인 작가마저도 때로는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곤혹스러워 한다. 그 속에는 현대미술의 창작적 근거와 핵심에 대한 중요하고 심각한 의미를 묻는 근원적인 부분이 있어 단편적으로는 결코 대답할 수 없는 내용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티스의 앞서와 같은 말은 그러한 질문에 그야말로 좋은 실마리와 출발을 제공할 수 있는 문장이라 생각된다. 그 속에는 대상을 있는 대로 그리고자 하는 전통적 회화의 재현의식과는 완전하게 결별하는, 현대회화의 새로운 과제가 그대로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대상의 이미지를 평면에 옮기는 동시에 평면으로서의 회화가 갖는 존재적 의미를 하나의 자율성으로 자립시키고자 하는 복합적인 시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상 현대회화의 숙명적인 과제는 매체에 대한 자기인식, 곧 회화라는 매체 자체로서의 ‘평면성’과, 역사적으로 오랜 교분을 나누어 왔던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한꺼번에 회화라는 이름아래 새롭게 공존시키는 일이다.
사실 ‘평면성’과 ‘대상의 이미지’는 서로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관계로 서로를 한 곳에 존립시키고 공존시키는 일 자체가 하나의 모순이며 이율배반이다. 평면으로서의 회화가 평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입체적인 대상의 이미지를 기피할 수밖에 없고 그 해결의 길은 추상적 이미지를 통한 ‘탈 입체화’의 길이다. 또 대상의 이미지를 살려 회화 특유의 인식론적인 매력을 살리는 길은 회화의 매체적 평면성을 파괴하여 입체적 이미지를 추구하는 곳에 있을 따름이다. 말하자면 ‘평면의 추구’와 ‘입체의 추구’라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방향을 한 곳에 모으고자 하는 난해한 과제가 현대회화에 주어졌다는 말이다.
실제로 근대회화의 역사는 이 양 방향의 심화에 존재의미의 핵심을 두고 있었다. 예컨대 르네상스 이래 줄기차게 달려왔던 근대의 길이 대상의 이미지를 평면위에 그럴듯하게 입체적으로 위장시키는 길이었고 사진이라는 이미지 포착의 기술이 돌발적으로 등장하기까지 위장의 극점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 그 한 편의 논리라면, 그러한 극점에서 회화의 존재가 대상묘사의 수단으로 전락 될 수밖에 없다는 자각을 통해 스스로의 평면적인 ‘장(場);간섭작용이 미치는 공간’의 독자성을 강조한 채 추상회화의 자율적 질서를 추구하여 갔던 길이 또 다른 한편의 대극적 논리였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측면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오늘날 회화의 새로운 과제의 하나로서 부상하게 되었던 것은 필연이었으며 그것은 현대회화의 이른바 ‘회화성의 회복’이라는 관점과 궤도를 같이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화가 김혜련의 작업은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눈 여겨 보아야 할 작업이다. 그의 작업이야말로 새로운 과제의 한 가운데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작업의 한 방향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회화의 오늘이 조금은 무기력하고 구심점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갈등과 문제의식을 잃은 채, 테크닉 위주의 전개를 보인다든지 아니면 소재주의적 요소로 기울어져 왔던데 그 원인이 있었다고 한다면 김혜련의 작업은 회화로서는 몹시 중요한 존재론의 맥락 속에서 스스로의 위상적인 가치를 새롭게 하려는 지점에 있는 회화의 하나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모든 이미지들은 대상의 입체성을 강조하는 이미지도 아닐뿐더러 단순한 탈구상적 표현의 이미지도 아니다. 그의 이미지는 오히려 개념적 양상을 두르는 구상적 이미지로서 이미지 발신의 코드가 지극히 다중적인 면모를 갖고 있다. 그것은 특히 이미지의 농축 과정 속에 회화의 평면성이 갖는 물리적인 이차원은 물론 시각적인 환영공간으로서의 삼차원을 극복한 채 독특한 조형공간에서 기묘하게 중립적으로 존립하는 이미지의 새로운 상황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 때, 회화의 조형적 중심으로서의 색은 인식의 수단으로서가 아닌, 그렇다고 단순한 체험과 직관의 대상으로서 머물지도 않는, 일련의 중성적인 동시에 융합적인 차원의 ‘존재방식’을 보여 주는 그러한 것이다.
그의 화면에 나타나는 이미지의 존재는 ‘재현적’인 차원도 아닐뿐더러 물리적이고 육질적인 ‘평면 오브제’의 차원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색은 물감이라는 존재가 평면이라는 회화의 조건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부닥뜨리게 되는 이중적 질서, 곧 ‘색’으로서의 비물질적인 차원과, 물리적 시간의 중첩으로서 나타나는 ‘두께’라는 물질적 차원의 교차 속에서 숙명적으로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갈등은 그의 회화를 새로운 해석의 차원으로 이끌어 보다 깊이 있고 의미 있는 그림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그것은 그의 그림이 색이자 동시에 물질이고 물질이자 동시에 색인, 기묘한 중립성 속에서 현대회화의 새로운 융합주의적 실마리를 던져 주고 있는 것이라 보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사물들의 이미지들은(나룻배를 비롯하여 책, 신발, 과일, 항아리 등) 특정한 대상의 이미지에 옭매이지 않고 오히려 보편적이고 나아가서는 개념적인 이미지를 체험케 하는 특성이 있다. 이를테면 그의 화면에서의 나룻배는 특정한 배의 재현도 아닐뿐더러 나룻배라는 이미지를 떠난 추상적 이미지도 아니다. 그것은 화면에서 새롭게 색과 더불어 탄생된 창조적 이미지이며 오히려 다양한 각도에서 이미지를 끌어 들일 수 있는 열려진 차원의 그림이다. 그 배는 인생의 항로를 건너는 배 일 수도 있고 고독하게 삶의 바다에서 고립되어 출렁이는 존재의 한 상징일 수도 있으며 한편으로는 배가 갖는 독특한 형태 자체의 개념적 감성, 혹은 물리적 이미지의 발생적 상황을 표출시키는 차원의 것으로서도 읽혀 질 수 있는 다양한 얼굴을 잠재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훨씬 서술적이면서도 결코 재현적이지 않은, 그래서 더욱 물감의 ‘물성’을 살린, 기묘한 시적(詩的) 이미지의 탄생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이미지의 탄생은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예민한(일상적인 관점에서는 지나치리만큼) 감성이 색의 형성층(발생론적인 층)에 깊이 있게 안착한 결과라 할 수 있고 그것은 특히 유화가 갖는 유화 특유의 무게감과 중층성을 제대로 살린 결과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물감이라는 존재가 전통적인 매체적 형식 속에서 어느 만큼까지 변신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로서 뿐만 아니라 유화의 조형적 최대공약수와 최소공배수를 가르쳐 주는 확인 시점으로서도 존재한다.
김혜련의 그림은 분명 배면 배, 책이면 책으로서 인식되지만 그것의 본래 형태와 이미지에 머물지 않는, 새롭게 쪼개어지고 휘날리는 작가의 육신과 영혼이 융합한 행위적 붓질 속에서 회화적 언어로 번역된 그림으로서, 보는 이에게 ‘이미지 고유의 이미지’를 전통적 회화 형식 속에서 새롭게 만나게끔 유도하고 조율하는 그림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림은 다양한 것 속에서 통일된 이미지를 전달하는 까닭에 화면에 밀도와 긴장도를 높여 작품의 내용이 극단적인 농축감과 더불어 시어화(詩語化)하게 한다. 말하자면 그냥 막 그린 그림이 사물의 서술성으로 시끄럽게 되는 것에 반해 오히려 조용하고 정숙한, 그래서 보다 시적인 응축된 화면을 생성시키는 특징이 있다는 말이다.
필자는 몇 년 전 그의 작업을 평가하는 글에서 ‘물감의 유목주의’, ‘색과 물성의 기묘한 공존관계’라 칭한 적이 있지만 지금도 이 평가는 그대로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더욱 이 평가가 차원을 높여 가는 과정에 작가가 서 있다고 하겠다. 사실 그가 그와 같은 지점에 이르기까지는 화면에 대한 막대한 연습량은 물론 작업행위에 고도의 숙련성과 감수성을 투입한 결과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일구어 온 작업의 세계가 결코 단순한 차원의 것이 아님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숙련성과 고밀도의 세계가 지나치게 기술적으로만 강조되고 내적인 다양성과 그것을 안으로부터 묶는 중성적인 밸런스가 무너지게 된다면 역설적으로 더 많은 서술성을 잉태시켜 일련의 과부하 현상을 초래할 위험도 없지 않지만 역설적으로는 이러한 위험성의 내포야말로 그의 세계가 지니고 있는 숙명적인 긴장감은 물론 그의 회화가 지니는 존재적인 특징을 한편에서 잘 말해 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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